1.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김별아 씨의 산문집은 그런 인용구로 시작하고 있었다. 열 살은 문제가 아니었다. 스무 살도 대개는 꿈으로 빛났다. 하지만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눈을 뜨려 할 무렵 찾아오는 서른은 경고장처럼 날아든다. 꿈, 실패, 낭비할 수 있기에 아름다웠던 젊음은 이제 지나가버렸다는 선언이 내려진다. 시간은 언제나 냉혹한 법. 사람들은 다시 <내일, 내일만은!>을 외치기 시작한다.

난 내가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것들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 흔히 그런 것처럼 나 역시 너무 자신의 이야기만 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서른이 다 되도록.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 정말 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일까, 하고.

많은 이들은─그의 친구와 마찬가지로─서른 살이 찾아올 무렵 자신의 안부를 물어오는 옆 친구에게 이렇게 묻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언제 네가 날 알고는 있었니?> 하지만 그게─당사자들의 주장대로─친구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었던 탓인지, 아니면 그 스스로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길 거부해왔던 탓인지는 알 수 없다. 서른이 다 되도록 무엇을 말해왔는지 알 수 없다는 모순. 나는 우정이 무엇인지, 자식은 무엇인지, 사랑은 무엇이며 또 알 수 없이 타오르는 이 정열과 방황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친구는 친구를, 어떤 이는 연락이 늦어지는 연인을 기다리며《걱정, 분노, 버려짐의 고뇌》로 이어지는 3막의 연극 무대에 빠진다.

나는 여전히 많은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정작 하고 싶었던 많은 얘기는 항상 숨겨두었다. 그래서 혹시나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하여 나만이 알 수 있는 은밀한 곳에 그 내용을 적어두곤 했다. 심야의 번화가가 내려다보이는 노대에 서서 바라보았던,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는 차들과 휘황찬란한 네온사인과 함께 들어왔던 그 옆모습들. 말들. 행위들. 입에서 뱉어진 흰 연기가 공중에서 소멸하는 걸 난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6년만에 피워본 한 개비의 담배에서 난 무슨 추억을 더듬어보려 했던 것일까. 난 난간에서 걸쳐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엔 그늘진 도보블럭과 한쪽에 쌓여있던 쓰레기봉투들이 있었다. 손을 내밀면 닿을 듯 그들은 너무나 가깝게 느껴졌다. 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린 후에야 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내일만은!'이라며 위로해야 한다. 어쩌면─투르게네프의 표현처럼─그 내일이 나를 무덤으로 데려다줄 그때까지도.

2. 삶엔 언제나 반전이 있었다. 나는 스스로에 관한 너무 많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생각하면서 동시에 나의 수수께끼는 풀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내일만은'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만'이라는 조사가 만드는 내일의 고유성을 언제나 잃어버리도록 만들었다. 롤랑 바르트는 반전(retournment)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다. <아무리 해도 당신을 잘 모르겠어요"라는 말은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 모르겠어요."라는 뜻이다.>

반전: 집착이 없는 관계를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잘 들여다보면 삶에는 균열이 있다. 그러니 모두에게 통용되는 법칙이 있을 거라는 건 환상일지도 모른다. 집착을 원하는 이에겐 집착을, 자유를 원하는 이에겐 자유를. 그건 내 나름의 반전이자 삶의 유통방식이었다. 하지만 그 균열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갈라지며 내가 생각한 모든 법칙을 깨트려버리곤 했다. 행복하게, 사랑과 함께, 성취감과 함께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오래 전부터 예측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만한 각오도 하고 있었지만 그건 내 예상보다 더 어려웠다.

내가 나를 제쳐두고 괴로워하는 건─롤랑 바르트가 말한 연민에 대한 이해와 마찬가지로─스스로를 취소하는 거와 다름 없다. 그러니 누구에 앞서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먼저 조금 떨어져 있어야 했다. 스스로에게 연민을 느끼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리를 유지하기 전에 난 나에게 먼저 예의바르게 다가서야만 했다.

3. 이제 나는 롤랑 바르트의 말을 살짝 바꾸어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찻집에 앉아 혼자 조용히 책을 읽거나 귀를 막은 채 음악을 듣는 건 그들이 정말 혼자이거나 책 혹은 음악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기 위해서라고. 그러니 내가 그들에게 매혹을 느꼈던 건 그들이 지닌 예술적 소양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그런 모습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지닌 태생적 슬픔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사랑에 관한 흔한 오해: 그건 기다림에 관한 것이다. 자신을 기다릴 수 있어야만 사랑이라 믿는 것, 헤어져있다 수 년 후에 만나도 지속될 수 있어야만 사랑이라 믿는 것. 롤랑 바르트는 다음과 같은 중국 이야기를 적어두었다. <중국의 선비가 기녀를 사랑하였다. 기녀는 선비에게 "선비님께서 만약 제 집 정원 창문 아래 의자에 앉아 백일 밤을 기다리며 지새운다면, 그때 저는 선비님 사람이 되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흔아홉번째 되던 날 밤 선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팔에 끼고 그곳을 떠났다.>

사랑은 의심하는 것도, 상대를 기다리게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어떤 이는 이 교훈을 새겨듣지도, 실천에 옮기지도 못할 것이며 '역시 저 선비는 기녀를 사랑하지 않았다'라고 말할 것이다.

4. 소설가 권지예 씨는 그의 소설 '뱀장어 스튜'에서 인생을 스튜 냄비의 밑바닦 같은 뜨거움을 견디고 사는 것으로 묘사했었다. <신이 조절한 타이머에서 종소리가 날 때까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삶을 물 끓어오르듯 강렬하게 살지 않는 건, 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냄비가 그를 종소리로 알리면 곧 냄비 밑바닥을 뜨겁게 달구던 격정을 꺼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한번 끓기 시작하면 냄비마저 새카맣게 태울 정도의 환희, 그 한 사람을 위한 영원성으로 들어가거나 혹은 물이 모두 증발한 후의 고통이 들어서기 전에 완전히 꺼버리는 수밖에 없다. 이도 저도 선택하지 못하는 이들은 끓었다 식었다를 반복하며 챗바퀴 같은 만족과 허무의 굴레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번 그 끓어오름의 뜨거움을 알게 된 사람들은 결코 그를 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렇게 끓어오르기 전에 스스로의 온도를 낮춰 평온하고 탈 없는 미지근함을 유지하려 한다. 어느 쪽이 현명한 건지는 모르겠다. "전 사랑에 관한 책은 안 읽어요. 그런 책을 읽으면 남자친구가 불안해하거든요." 내가 추천한 한 권의 책에 대해 그녀는 그렇게 대답했었다. "그럼 읽지 않는 게 좋겠네요." 난 쉽게 대답했다. 끓어오름에 대한 불안함. 아직 알지 못한 진실에 대한 불안함. 어느 쪽이 현명한 건지 모른다. 난 여전히 알 수 없다.

5. 그런 식으로 나의 내일은 오고 서른은 다가오며 사랑은 떠나고 스스로를 망각해간다. 그러다 어느 날 어렴풋이 떠오른 과거를 회상하며 그 사람을, 그리고 스스로를 아파해갈 것이다.

Posted by 김영욱

2008/04/26 12:34 2008/04/26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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